java

Monday, July 21, 2014

the Imperial Japan's curse piles were knocked for bad feng shui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27/2013092702422.html
[Why][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조선의 精氣 끊으려던 日帝 쇠말뚝의 또 다른 진실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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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9.28 03:03
日帝의 쇠말뚝
"조선침략 위한 측량…山 숭배하는 韓·中·日자연 함부로 훼손 안 해"

이여송도 조선에 박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 구한恩人으로 칭송 받아…40개 넘는 地脈 끊었다고?그는 가본 적도 없는 곳"

'일본놈들'은 정말로 쇠말뚝을 박았을까? 오랫동안 필자는 전국의 '쇠말뚝'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여송이 맥을 잘랐다'는 것과 '일본놈들의 쇠말뚝' 이야기가 많았다. 왜 쇠말뚝을 박을까? '산의 파괴는 인간의 비극(山破人悲·산파인비)'이라는 풍수설 때문이다.

'쇠말뚝(鐵�·철익)'이란 말을 맨 처음 꺼낸 이는 조선의 학자군주 정조임금이었다. 사연은 고려 공민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민왕은 기울어져 가는 원나라를 버리고 새로이 개국한 명나라 주원장과 관계를 튼다. 이에 주원장은 1370년(공민왕 19년) 도사 서사호(徐師昊)를 고려에 파견하여 명산대천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고려가 명에 복속된 만큼 천자가 산천에 제사를 지냄에 고려의 산천 또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주원장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만, 천하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 아니었다. 원의 사위국인 고려를 함부로 할 수 없어 주원장은 초기에 고려와 공민왕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제후국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나라를 세운 천자로서 관례였다. 쇠말뚝을 박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도사 파견에 '압승술(壓勝術·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을 누르는 일)'을 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경기도 안양 삼막사에서 발견된 일제 혈침 추정 쇠말뚝 2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2009년 12월 10일 사진
'경기도 안양 삼막사에서 발견된 일제 혈침 추정 쇠말뚝 2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2009년 12월 10일 사진 / 뉴시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385년(우왕 11년)의 일이다. 이때는 공민왕의 피살, 고려와 원의 관계 복원 움직임 등으로 명나라와는 매끄럽지가 못했다. 명나라가 사신 장보(張溥)를 보내 서사호가 세운 비(개경 남쪽 陽陵井·양릉정에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비석이 세워진 뒤 병란, 수재, 한발 등이 잇따르자 고려 조정은 비를 넘어뜨려 버렸다. '압승비(碑)'때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이 소문이 명나라까지 전해지자 장보로 하여금 확인케 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797년 정조 임금은 "서사호가 단천 현덕산에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난 이후 북관(北關)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서사호는 맥을 자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지맥을 자른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전주시 금상동에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무덤이 있다. 회안대군은 2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이자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에게 패한 인물이다. 그는 전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묻힌다. 문제는 그 자리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老鼠下田形·노서하전형)'의 길지였다는 점이다. 나중에 이를 안 이방원은 산에 뜸을 놓고 맥을 자르게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회안대군 후손들은 자신들이 '호미 자루를 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믿게 된다. 맥이 잘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길지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호남의 길지로 소문이 나서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땅에 또 쇠말뚝을 박은 이들은 누구일까? 이여송(李如松)과 일본인들이 '주범(主犯)'으로 알려져 있다. 이여송은 누구인가? 조선의 후예로서 명나라의 명문가였다. 아버지 이성량은 명나라를 지켜주는 동북(요동)지방의 최대 군벌이었다. 아들 이여송이 조선에 출병할 때 "조상의 고향이니 구원에 힘쓰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평양으로 후퇴하였다가 그 해 9월에 귀국한다(이상은 '明史·명사'의 기록이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이여송이 1593년 5월 문경까지 내려갔다가 9월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한다(이여송이 직접 출전하지 않고 그 휘하 부대가 문경까지 갔을까?). 확실한 것은 그가 조선에 머문 것은 1년이 채 안 된 짧은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이여송에 대한 조선 조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조선을 재건시켜 준 '재조조선(再造朝鮮)'의 은인이었다. 심지어 평양에 생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 후손을 챙겼다(이여송은 조선에서 琴·금씨 여인을 취해 후손을 남겼다). 그러한 이여송이 조선의 맥을 잘랐다는 것이다.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이여송이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에서 40개 이상의 지맥을 자른 것'으로 조사하였다('풍수침략사 연구시론'). 이여송이 밟지 않은 지역들이다.


조선의 후예로 명나라의 요동지방 군벌에 올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 이여송의 초상화
조선의 후예로 명나라의 요동지방 군벌에 올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 이여송의 초상화 / 일본 덴리대학교 제공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 이방간은‘2차 왕자의 난’때 태종 이방원에게 패배한 뒤 유배 생활을 하다 여기에 묻혔다. 이 묏자리 가 길지임을 안 태종은 산에 뜸을 놓아 맥을 자르게 했 다고 한다. /안전행정부 한국지역진흥재단 제공
'일본놈들의 쇠말뚝'설은 또한 어떠한가? 곳곳에 그러한 전설이 전해진다. 부분적으로 개연성이 있는 곳도 있다. 그런데 쇠말뚝의 입지나 유형들이 너무 다르다. 일제가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19세기 후반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주변 열강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측량이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도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에서 비롯된다. 1895년에는 일본은 200명 이상의 측량사를 보내 전국을 측량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다. 1912년 일제가 삼각측량 실시에 즈음하여 시달한 주의사항 가운데 "삼각점 표석 밑에 마귀를 묻었기 때문에 재액이 닥쳐올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이후 측량사업은 식민지 건설(도로·철도·신도시 등)로 더욱더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입장에서 '마귀를 묻었다'고 오인하였다. 특히 조상 산소 뒷산에 삼각점이 박힐 경우 '쇠말뚝'으로 여겨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둘째, 한·중·일 삼국 모두 산악숭배사상이 지대하여 명산대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냈다. 800만 이상의 신을 상정(想定)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신이 계시고(神の坐す), 신이 강림하고(神が降り立つ), 혼이 소생하는(魂が蘇る) 곳이 바로 산이다. 명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할 때 그 산천에 제사를 모셨듯, 이미 일본 땅이 되어버린 조선의 산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영산으로 알려진 곳에 그들의 신사를 지어 신성시하였다.

결국, 쇠말뚝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자의 '주인 의식 결여와 피해 의식'의 산물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국의 영산 정상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육중한 송수신 탑이 무수하다. 더 큰 쇠말뚝이다. 굴착기를 동원하여 산을 평지로 만드는 것은 식전 해장거리도 안 된다. 더 큰 맥 자르기이다. 흐르는 강물을 막고, 산줄기를 무 자르듯 하여 생태계를 교란시킨다. '이여송·일본놈 쇠말뚝'에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정작 이것을 우려하는 이는 드물다. 이 또한 자기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주인 의식의 결여 아닌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帰って来た仕事コナカッタ元声優φ ★ : 2013/09/30(月) 18:49:46.74 ID:???
■朝鮮の精気切ろうとしていた日帝の鉄杭、もう一つの真実

「日本人ども(イルボンノム)」は本当に鉄杭を打ち込んだのだろうか? 永らく筆者は全国の「鉄杭」現場を現地調査した。「李如松(訳注:文禄の役の際の明軍の将軍)が脈を切った」という話と「日本人どもの鉄杭」という話が多かった。<中略(李如松説について)>

では「日本人どもの鉄杭」説はどうだろう。あちこちでそうした伝説が伝えられている。部分的に可能性がある所もあるが、鉄杭の位置や形がかなり違っているう。日帝が全国レベルで組織的に犯した見るのは難しい。以下2つの理由からだ。

まず第一に、19世紀後半に朝鮮侵略のため周辺列強が一番最初にしたのが測量だ。1875年の雲揚号事件も日本の朝鮮沿岸測量から始まった。1895年には日本は200人以上の測量士を送って全国を測量する。これに対する反発から多くの朝鮮人が犠牲になった。1912年に日帝が三角測量実施の際に示達した注意事項の中には、「三角点の標石の下に邪鬼を埋めたので災厄が迫ってくる、というデマにだまされないこと」という内容が目につく。

その後、測量事業は植民地建設(道路・鉄道・新都市など)で一層頻繁になったが、国を奪われた人々は「邪鬼を埋めた」と誤認した。特に先祖の墓の裏山に三角点が打ち込まれた場合、「鉄杭」と感じて怒りを呼び起こすのに充分だった。

第二に、韓中日の3国とも山岳崇拝思想が強く、名山大河を疎かにしなかった。位階を授与して儀式を行った。八百万以上の神を想定する日本も同じだ。「神の坐す」「神が降り立つ」「魂が蘇る」場所こそ山だ。
明が高麗を属国にした際にその山河で儀式をしたように、既に日本の土地となった朝鮮の山河を疎かにしなかった。霊山として知らされた場所には彼らの神社を作って神聖視した。結局、鉄杭の話は国を奪われた者の「主人意識欠如と被害意識」の産物だ。<後略> -- 金ドゥギュ/又石大学教養学部教授

▽ソース:朝鮮日報(韓国語)(2013.09.28 03:03)

165 :<丶`∀´>(´・ω・`)(`ハ´  )さん :2013/09/30(月) 20:24:03.82 ID:eCHKaaUY
>>1
>日本人どもの心で見れば朝鮮民族抹殺の鉄杭と考えられる

期待に沿えず人口を増やしてしまってごめんなさいw

医師の数 (1912-1943)
http://blog-imgs-44-origin.fc2.com/y/e/o/yeoksa/05welfare_doctor1912-1943.jpg

感染症患者の死亡率(1919-1943)
http://blog-imgs-44-origin.fc2.com/y/e/o/yeoksa/05health_infection1919-1943.jpg

人口 (1911-1943)
http://blog-imgs-44-origin.fc2.com/y/e/o/yeoksa/02population_population1911-1943.jpg

児童保護事業 (1926-1943)
http://blog-imgs-44-origin.fc2.com/y/e/o/yeoksa/05aid_child_protection1926-1943.jpg

知ってはならない日帝時代の真実 (韓国語)
日帝時代の統計資料
http://yeoksa.blog.fc2.com/?tag=%ED%86%B5%EA%B3%84%EC%9D%BC%EB%9E%8C


http://u1sokuhou.ldblog.jp/archives/50387360.html

「韓国政府の公式地図の非常識極まる捏造改竄が発覚」 大韓民国全図の出鱈目さ加減が自白される
0拍手
1:Johnnyφ ★:2012/11/20(火) 18:36:20.09 ID:???

韓国全図の電子版配布へ 独島を正しい位置に表記

【ソウル聯合ニュース】韓国国土海洋部の国土地理情報院は20日、国土を立体的に表した大韓民国全図と縮尺25万分の1の地形図の電子版を作成し、年末からホームページで配布すると明らかにした。

従来の大韓民国全図では、陸地から遠い独島や離於島(中国名:蘇岩礁)、可居礁(日向礁)の位置を便宜上、実際より陸寄りに表記していたが、新地図では正しい位置に表記した。また、独島には先ごろ制定した東島と西島の峰の公式地名「于山峰」「大韓峰」も表記し、領有権を明確にした。地形の標高や起伏を色の濃淡や陰影で表現し、立体的な地図に仕上げている。

聯合ニュース (朝鮮日報日本語版)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2/11/20/2012112002241.html


2:Johnnyφ ★:2012/11/20(火) 18:37:02.00 ID:???

独島・離於島の位置を正確に表記した電子地図発行

国土海洋部(省に相当)は独島(日本名:竹島)と離於島(中国名:蘇岩礁)の位置を正確に表記した電子地図を発行した、と20日発表した。

同部は韓国の国土を立体的に表現した大韓民国全図と縮尺25万分の一の地形図をそれぞれ電子地図として制作、今年末から供給する。

カン・セフン記者
NEWSIS/朝鮮日報日本語版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2/11/20/2012112001502.html


3:<丶`∀´>(´・ω・`)(`ハ´  )さん:2012/11/20(火) 18:37:41.80 ID:qk0pt6kI

便宜上ってw
地図の書き方も知らなかったのか、すげーよ



7:Johnnyφ ★:2012/11/20(火) 18:40:05.91 ID:???

★Johnny's memo★

海洋情報部 韓国の航海用電子海図(ENC)について (注意喚起)

今般、韓国が刊行している九州沿岸のENC( KR3G3G00, KR3G3K00)に、以下のとおり航海安全上危険を及ぼすようなデータが多々存在することが判明しました。

韓国の水路当局に対しては既に連絡を行っているところですが、同海域の航海には我が国
刊行のENCを使用していただくようお願いします。


○韓国刊行ENCの九州沿岸地形等(白い線)は、日本測地系と推定され、南南東に約500mずれています。
ENCの場合はGPSによる絶対位置を表示するため、海図情報が全体にずれていることは非常に危険です。

○現状の地形と異なっています。
ひびきコンテナターミナル及び白島石油備蓄基地が記載されていないなど、地形が著しく現状と相違しており危険です。

○灯台の明弧が逆転していたり、航路標識情報に誤りがあったり、著しく現状と相違しており危険です。

○浅所や障害物の情報が現状と相違しており危険です。

海上保安庁海洋情報部 更新日2009年2月4日
http://warp.ndl.go.jp/info:ndljp/pid/259973/www1.kaiho.mlit.go.jp/KOKAI/ZUSHI3/cation/cation.html

21:<丶`∀´>(´・ω・`)(`ハ´  )さん:2012/11/20(火) 18:49:01.94 ID:t9lhibC5
……ちょっと何言ってるかわからない。
この国は本当に2012年か?

30:<丶`∀´>(´・ω・`)(`ハ´  )さん:2012/11/20(火) 18:55:03.72 ID:KbfX5nRF
>>21
測位や作図に関しては1950年代の日本以下です
測量点の杭に関しては日帝の呪いと言って片っ端から抜いてるので
いずれ自国の地図さえ作れなくなる退化国家です

23:<丶`∀´>(´・ω・`)(`ハ´  )さん:2012/11/20(火) 18:50:03.61 ID:SW3YJMn+
最初から正確な距離が求められるかすら怪しいw
韓国は地図衛星って飛ばせたんだっけ?

26:<丶`∀´>(´・ω・`)(`ハ´  )さん:2012/11/20(火) 18:52:01.87 ID:V9TAGqjE
>>23
っていうか韓国に独自の水準点がないw

33: ◆65537KeAAA :2012/11/20(火) 18:55:50.79 ID:zy5TjS4f
独自の水準点はあるよ!
ただソレを信じると、なぜか赤道直下にあることになるけど

 
http://japanese.donga.com/srv/service.php3?biid=2006042103768

社説

[社説]「でたらめな基準、生半可な統計」で先進国を夢見るのか
APRIL 21, 2006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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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交通部傘下の国土地理情報院が管理する水準点や三角点など、いわゆる国家基準点がミスだらけだと監査院が指摘した。特定地点の海抜を示す水準点は、全国の約6000ヵ所に表示してあるが、そのうち60%は紛失状態で、残りのものもでたらめが多いと言う。これらの水準点に従って、釜山(プサン)と巨済(コジェ)をつなぐ橋を作ろうとしたら、中間部分で橋脚が1メートルも違ってしまうと言う、ぞっとするような話だ。
特定場所の緯度と軽度を書いて位置を知らせる三角点にも間違いが多い。地理情報院の表記通り計算すると、江原道鉄原郡葛末面(カンウォンド・チョルウォングン・ガルマルミョン)は地中海に、京畿利川市(キョンギ・イチョンシ)は西海に、全南麗水市華井面(チョンナム・ヨスシ・ファジョンミョン)は赤道にある。

地理情報院は1997年から衛星航法システムを利用して、全国2万2000ヵ所の三角点と水準点を新たに測定し、表記を見直してきたというのに、その結果がこんなだととは。今まで、国民の税金を297億ウォンもかけて何の修正作業をしてきたというのか。大規模建設事業が間違った国家基準点に基づいて進められているとなると、手抜きと浪費は避けられない。

政府の間違った統計も、誤った政策につながるのは同じだ。住宅保有統計さえ建設交通部は1252万世帯、行政自治部は1673万世帯、韓国銀行は1530万世帯だと発表する国だ。最大421万世帯もばらつきがある統計を適当に活用して樹立した住宅政策と金融政策に、果たして整合性と的実性があると言えるのだろうか。

政府の税収推計はほとんど合ったことがなく、間違っているのが当然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非正規職勤労者の統計を間違えて発表して労働部長官が謝罪し、行政自治部は「総人工の上位1%が私有地の51%を占めている」とし、赤ん坊まで含めて誇張された生半可な統計を発表して、統計庁の指摘を受けたこともある。

でたらめな国家基準点と統計ミスの国は、どこへ向かっていくのだろうか。政府も頼もしくなく不安だ。国の事を正確な基準と正直な統計に基づいて営まなければ先進国入りは遠ざかるしかない。




143:<丶`∀´>(´・ω・`)(`ハ´  )さん:2012/11/20(火) 19:46:10.19 ID:FTe0fpAn

エゲレス(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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ヘタリア(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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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さん(17世紀中旬)

kochizu

北アメリカの西にジパングがあるな、ちけえよwww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3/2008102300968.html

[최선웅의 지도 이야기] 대한해협과 대마도
"대마도도 우리 땅 역사적 증거 얼마든지 있다"
해협(海峽=strait)이라 함은 육지와 육지 사이, 또는 육지와 섬 사이에 끼여 있는 좁은 해역(海域), 즉 두 개의 바다를 연결하는 바다의 좁은 부분을 말한다. 섬과 섬 사이의 좁은 바다도 이에 해당되나 그 규모에 따라 수로(水路), 수도(水道), 목(項) 등으로 달리 부른다.


이같이 해협은 육지와 육지 사이의 최단 거리가 되고, 두 바다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교통이나 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지중해의 관문인 지브롤터해협, 페르시아만의 유일한 통로인 호르무즈해협,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의 믈라카해협,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 등이 그 예다.


▲ 왼쪽의 지도는 우리나라 중학교 사회과부도에 실린 대한해협 부분 지도이고, 오른쪽은 일본의 중학교 사회과지도에 실린 대한해협 부분 지도다. 같은 해협을 놓고 양국간에 표기가 극명하게 다르고, 현해탄의 위치도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제주해협, 한려수도, 울돌목과 같은 크고 작은 해협이 있으나 일본과의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은 양국의 명칭과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명칭이 각기 달라 동해와 독도와 같이 양국간에 명칭 표기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정확히 말해 이 해협은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 규슈(九州)섬 북단 사이이며, 동해와 동중국해를 연결하는 해협으로 전체 폭이 200km에 이른다. 해협 가운데에는 비교적 큰 섬인 대마도가 위치하고 있어 명칭 표기에 혼란이 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과용 지도책인 사회과부도를 조사한 바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1980년대까지는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를 ‘대한해협’, 대마도와 규슈 사이를 ‘쓰시마해협’으로 대마도를 중심으로 구분해서 표기했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마도를 무시하고 해역 전체를 ‘대한해협’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1950년~1980년대까지는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를 ‘조선해협’, 대마도와 규슈 사이를 ‘쓰시마해협’으로 구분해서 표기했으나 1980년대 이후로는 전 해역을 ‘쓰시마해협’으로 단독 표기하고 있어 공교롭게도 양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표기방법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한해협의 표기는 ‘코리아 스트레이트(Korea
Strait)'이고,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고 있는 스쿨 아틀라스도 모두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대한해협이란 명칭은 1850년경부터 유럽의 지도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1861년 영국에서 발간된 ‘일본왕국(Empire Japan)'이란 지도(한송본씨 소장)를 보면 대한해협을 ‘STRAIT OF COREA’로 표기하고,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를 ‘Broughton Channel(or West Corea Strait)’, 대마도와 규슈 사이를 ‘Krusenstern Channel(or Eest Corea Strait)’로 표기하고 있다. 브로튼은 영국의 탐험항해가로 1797년 우리나라 해역을 탐사하였고, 크루젠스테른은 1805년 세계일주 탐사항해를 할 때 대마도와 규슈 사이 해협을 통과하였던 러시아 사람이다.

외국 지도에 ‘쓰시마해협’ 단독 표기 늘어

그러나 최근 미국을 비롯한 몇몇 아틀라스에서 ‘쓰시마 스트레이트(Tsushima Strait)’로 단독 표기되는 경우가 늘고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아직도 일부 사회과부도에서 대한해협을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에 표기하는 사례가 있으며,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일본과의 기사거리만 생기면 대한해협은 까맣게 잊은 채
“현해탄”운운하고 있어 대한해협의 고유성을 우리 자신이 훼손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해협은 현해탄(玄海灘)으로 불리었으나 정작 현해탄의 위치는 규슈 북단의 일부 해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본에서는 겐카이나다(玄界灘) 또는 겐카이(玄海)라 부른다. 또 일본은 해협의 명칭을 더욱 세분하여 한반도와 대마도 간을 西水道(朝鮮海峽)로, 대마도와 규슈 간을 東水道(玄界灘)로 표기하고, 넓은 의미로는 현해탄과 이키(壹岐)수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규슈 북단·혼슈(本州) 서안 사이의 해역 전체를 쓰시마해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사회과부도를 위시하여 대마도의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용례에 따라 쓰시마 섬으로 쓰고 있으나 대마도에 대한 표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비교적 큰 섬에 대해서는 명칭 뒤에 섬(島) 자를 붙이지 않기 때문에 대마도의 경우도 ‘쓰시마(對馬)’라 표기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쓰시마 섬’이라 표기하는 것은 옛 선조들이 평정했던 대마도를 속절없이 포기하는 꼴이 되고 만다.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대마도는 우리 영토에 포함

2005년 3월16일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경상남도 마산시의회에서도 2005년 3월18일 조선 세종 원년(1419년) 9월19일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한 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9월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마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진 않지만 60년 전인 1948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당시 연합군사령부에도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는데 일본에 의해 강제적, 불법으로 점령당했다”며 일본으로부터 대마도 할양을 요구한 바 있다.

이밖에도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고증자료가 얼마든지 있다. 세종실록 4권에 상왕(태종을 이름)이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교화에 응할 것을 교유한 내용 가운데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對馬爲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라는 글이 있다. 뿐만 아니라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목판본 지도인 팔도총도를 비롯하여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지도에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 안에 포함시켰다.

지난 7월 국내 여론기관 리얼미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마도에 대한 반환 촉구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견이 50.6%, 반대 의견은 33.5%로 나왔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부터 일관되게 교과서 지도책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표기하고, 동해를 버젓이 니혼카이(日本海)로 표기함은 물론 우리나라와의 국경계를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표시하고, 툭하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이참에 우리도 사회과부도는 물론 모든 지도에 쓰시마섬을 대마도로 표기하고, 일본과의 국경을 대마도와 규슈섬 사이에 그려 넣자. 그리고 저들이 독도를 들먹이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맞대응하자.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page=11&uid=ds2hcg&folder=12&page_size=5&viewtype=1

외국 지도에 ‘쓰시마해협’ 단독 표기 늘어

그러나 최근 미국을 비롯한 몇몇 아틀라스에서 ‘쓰시마 스트레이트(Tsushima Strait)’로 단독 표기되는 경우가 늘고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아직도 일부 사회과부도에서 대한해협을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에 표기하는 사례가 있으며,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일본과의 기사거리만 생기면 대한해협은 까맣게 잊은 채 “현해탄”운운하고 있어 대한해협의 고유성을 우리 자신이 훼손시키고 있는 실정이다.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해협은 현해탄(玄海灘)으로 불리었으나 정작 현해탄의 위치는 규슈 북단의 일부 해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본에서는 겐카이나다(玄界灘) 또는 겐카이(玄海)라 부른다. 또 일본은 해협의 명칭을 더욱 세분하여 한반도와 대마도 간을 西水道(朝鮮海峽)로, 대마도와 규슈 간을 東水道(玄界灘)로 표기하고, 넓은 의미로는 현해탄과 이키(壹岐)수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규슈 북단·혼슈(本州) 서안 사이의 해역 전체를 쓰시마해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사회과부도를 위시하여 대마도의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용례에 따라 쓰시마 섬으로 쓰고 있으나 대마도에 대한 표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비교적 큰 섬에 대해서는 명칭 뒤에 섬(島) 자를 붙이지 않기 때문에 대마도의 경우도 ‘쓰시마(對馬)’라 표기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쓰시마 섬’이라 표기하는 것은 옛 선조들이 평정했던 대마도를 속절없이 포기하는 꼴이 되고 만다.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대마도는 우리 영토에 포함

2005년 3월16일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경상남도 마산시의회에서도 2005년 3월18일 조선 세종 원년(1419년) 9월19일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한 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9월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마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진 않지만 60년 전인 1948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당시 연합군사령부에도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는데 일본에 의해 강제적, 불법으로 점령당했다”며 일본으로부터 대마도 할양을 요구한 바 있다.이밖에도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고증자료가 얼마든지 있다. 세종실록 4권에 상왕(태종을 이름)이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교화에 응할 것을 교유한 내용 가운데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對馬爲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라는 글이 있다. 뿐만 아니라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목판본 지도인 팔도총도를 비롯하여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지도에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 안에 포함시켰다. 지난 7월 국내 여론기관 리얼미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마도에 대한 반환 촉구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견이 50.6%, 반대 의견은 33.5%로 나왔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부터 일관되게 교과서 지도책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표기하고, 동해를 버젓이 니혼카이(日本海)로 표기함은 물론 우리나라와의 국경계를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표시하고, 툭하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이참에 우리도 사회과부도는 물론 모든 지도에 쓰시마섬을 대마도로 표기하고, 일본과의 국경을 대마도와 규슈섬 사이에 그려 넣자. 그리고 저들이 독도를 들먹이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맞대응하자.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106 :<丶`∀´>(´・ω・`)(`ハ´  )さん:2013/12/30(月) 09:45:45.95 ID:JkST9CIM
>>71
元々は当時の人気マンガ「カクシタル」。

しかし、まだマンガのことだからと信じなかった韓国人も多かったが、
金泳三がやって以降、信じられるようになったって聞いたな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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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心者】韓国・北朝鮮に関するよろず質問スレ2ダ
http://ex5.2ch.net/test/read.cgi/korea/1037297568/309
309 名前:柳■ 投稿日:02/12/04 22:04 ID:24cEJiJ6
質問ニダ

朝鮮総督府の建物を壊した時期に
地脈に影響を与える鉄杭が刺されていて、それを抜いたと聞きましたニダ

いつ頃なのか、ソースがあれば教えてくださいニダ

315 名前:  投稿日:02/12/05 00:06 ID:+UgxASzP
>>309
鉄杭を撤去したのは1995年。
杭を抜いたというソースは
『変化と改革---金泳三政府国政五年資料集』(全四巻。1997年12月発行)

日帝が地脈を意識していたかはソースなし。

読書録だけど、ちょっと載ってたので、
http://www6.plala.or.jp/Djehuti/22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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リンク切れのためインターネットアーカイブにリンク
ttps://web.archive.org/web/20021221230736/http://www6.plala.or.jp/Djehuti/222.htm
荒俣宏『風水先生』(集英社文庫、1994年)

日帝が意識していたかについて引用

荒俣宏が挙げる第一の証拠は鉄杭。これは龍脈を断つべく、朝鮮のあちこちに埋めら
れたとされる。そして第二の証拠は、朝鮮総督府が昭和6年に出版した『朝鮮の風
水』という本。(中略)荒俣宏は「たしかに日本は朝鮮半島を支配する
ための方法として、風水を悪用した節がある」(84頁)と結論づける。

107 :<丶`∀´>(´・ω・`)(`ハ´  )さん:2013/12/30(月) 09:54:16.27 ID:a+0hyE5a
>>105
第二次大戦中 ドイツはジプシー占いで作戦立ててたし イギリスは 国内の黒魔道士を集めてヒトラー呪い殺そうとしてた

日本も成田山の坊主は マッカーサー呪い殺すゴマを焚いてた

あの頃から進歩してないんだよ 朝鮮は(笑)

108 :<丶`∀´>(´・ω・`)(`ハ´  )さん:2013/12/30(月) 09:58:08.97 ID:Z1DqFDGA
>>107
マッカーサーじゃ無くてルーズベルトじゃ?

109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01:42.33 ID:9xKoA2fI
>>108

凄いニダ!チョパーリの呪いは本当に効くニダよ! 早速ウリナラ起源を主張するニダ!!!

110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06:06.90 ID:xq/ZWwib
>>108
でも、ルーズベルトが死んだ時に「史上最悪の戦争犯罪者が死んだ」と言って喜ぶどころか、
弔文をおくる日本は、本当に効くと思っていなかったか、奴の死の真犯人である事を偽装したかったのどちらかニダw

111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06:24.83 ID:h9Qs8vDN
てか本当に鉄杭ってむこうの奴に信じられてるん?
山手線や環状線が帝都東京の結界だとかそういうマニアが面白がる系の話じゃなくて?

112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09:40.54 ID:9xKoA2fI
>>111
無知な人間は本当だと思っているし、知識層や政治家にとっては単なる反日の口実でしかない

113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19:29.59 ID:gl1shSZM
>1895年には日本は200人以上の測量士を送り込み、全国を測量した。これに反発した多くの朝鮮人が犠牲になった。

鮮人は鮮人だな、さらりと嘘をつく。本当は未開の朝鮮土人に襲撃されて測量士が犠牲になった。



114 :<丶`∀´>(´・ω・`)(`ハ´  )さん:2013/12/30(月) 10:21:30.55 ID:LRtkzxqp
不思議だ...。

ここまで風水を気にするなら、
なぜ韓国の国旗が不吉だとされている事は気にしないんだろう?

115 :兎悔氏 ◆fNviSKUljJ72 :2013/12/30(月) 10:24:41.67 ID:hCVyWLvi
>>111
現代財閥が汚職や内紛でゴタゴタして終いには跡取り息子が自殺した事があった。
その時、ある新聞で堂々と「新しい自社ビルが風水的に悪いニダ」って記事が載せられていた。
そんで記事を載せたのは朝鮮日報です。


119 :桃太郎:2013/12/30(月) 10:27:08.17 ID:USrhVKf2
設計ミスで強度不足な鉄塔。



民度の低さ アホ~  最後の一コマは思わず笑ってしまいます。


159 :<丶`∀´>(´・ω・`)(`ハ´  )さん:2013/12/31(火) 19:50:08.31 ID:a3cWnbLY
民衆蜂起と「迷信」
次の一例は明治32年(1899年)3月、全羅南道破平郡、霊光郡地方で起きた明太魚(スケトウダラ)事件である。

明治32年1月、全羅北道沃溝郡を襲った津波により生じた被害は「前年日本人が沃溝郡臨波地方の山頂に登り、明太魚を埋め歩いたため」
であるという風説が広がっていた。
民衆は「日本人は山に登り、地を掘り、明太魚の目を針で貫き、これを地に埋め、朝鮮人を祈り殺す者なり」と確信した。

3月10日、中尾芳太郎らの測図班が投宿した威平郡の宿舎へ押し掛けた数十人の群衆もまた
「日本人当地方に来たり登山するは 、前のごとく山上に明太魚を埋め、海哺(津波や高潮)の如き天災を起して、我地方の人民を祈り殺さむ
とする者なり」と激しく抗議した。この時は「百方弁解慰謝の上」事なきをえたが、16日、霊光郡長古の住民は中尾を捕らえ殴打した。
このため中尾は4月上旬まで東莱温泉で療養しなければならない傷を負った。

中尾自身が記した「遭難始末書」によれば
16日午後4時すぎ、長古南方の山上(のちの三角山力)で作業中、ふもとの住民多数が棍棒を携え中尾を取り囲み
「明太魚はどこに埋めたるか白状すべし。何ゆえに明太魚を埋めて洞民を殺そうとするか」と詰問の上、測板、携帯嚢、拳銃、旅券などを奪い、
さらにふもとの沢内へ連行し捕縛したまま乱打したという。中尾が釈放されたのは午後8時40分で、彼が宿泊地へ帰着したのは12時すぎであった

朝鮮測図事業と朝鮮民衆 <海野福寿>


the record of Joseon missions to Japan in 1711

http://webarchives.tnm.jp/dlib/detail/100
QA-1471
朝鮮信使来聘記録
ちょうせんしんしらいへいきろく
詳細
員数
1冊
時代
成立年代不明; 江戸時代・万延2年(1861)写
寸法
23.5×15.6
形状
袋綴
解題
正徳元年(1711)に来朝した朝鮮通信使に関する記録。
奥書から万延2年(1861)に京都天龍寺妙智院の蔵書から書写されたことが分かる。
対馬で外交事務を行っていた以酊庵へは天龍寺からも僧侶が派遣されていたので、このような記録が同寺に残されたのであろう。
通信使の名簿や禁制、船の大きさや通信使が着用していた衣服などが記されている。特に通信使持参の道具や楽隊の楽器は絵入りで記され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