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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21, 2012

south archipelago conflict between Japan and China, japan should be blamed own war crime

http://www.sueddeutsche.de/politik/inselgruppen-konflikt-zwischen-japan-und-china-schuld-sind-die-anderen-1.1471778

Inselgruppen-Konflikt zwischen Japan und China
Schuld sind die anderen
19.09.2012, 15:36
Von Christoph Neidhart, Tokio
Der Streit zwischen Japan und China um eine Inselgruppe reißt alte Wunden auf. Für die Chinesen sind die Inseln ein Symbol, mit ihrer Besetzung habe die Demütigung Chinas durch Japan begonnen, argumentieren sie. Aber auch die Japaner sehen sich als Opfer.


Die Japaner sind entsetzt. Sie bangen um ihre Landsleute in China und fürchten, der Streit um die Senkaku-Inseln belaste ihre Wirtschaft zusätzlich, die seit zwanzig Jahren in einer Dauerkrise steckt. Sie wollen nicht verstehen, warum die Chinesen so aggressiv sind, seitdem die japanische Regierung drei der Inseln von Privatleuten gekauft hat. Auf der Straße hört man sogar, es könnte Krieg geben.

Bilder
Streit um Inseln Chinas Wutbürger nehmen Japan ins Vi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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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nationalistische Rechte, die in Japan bis weit in die Mitte und in die Regierung hinein reicht, hetzt gegen China und auch gegen Südkorea, denn auch mit den Koreanern streitet Japan über Inseln. Auch jener Konflikt ist in den letzten Monaten wieder aufgeflammt.

Selbst besonnene Japaner reagieren derzeit wütend auf China und Südkorea. Sie sehen Japan als Opfer und erklären die Eskalation mit dem Erstarken der Nachbarn. Sie nutzten Japans Schwäche, heißt es, und würden mit dem Inselstreit von Binnenproblemen ablenken wollen.

Dass Peking für seine Ansprüche auf die Diaoyu-Inseln, wie sie auf Chinesisch heißen, ernstzunehmende Argumente hat, das wissen die wenigsten Japaner. Denn sie werden fast so einseitig informiert wie die Chinesen. Das Außenministerium in Tokio behauptet, die fünf Inseln und drei Felsen seien "seit jeher japanisches Territorium". Sie seien, als Japan sie 1895 besetzte, noch terra nullius gewesen, also staatsrechtlich herrenlos.

Nach dem Zweiten Weltkrieg kontrollierten die USA die Inseln

Peking dagegen will mit Dokumenten beweisen, schon die Ming-Dynastie habe sie China einverleibt. Tokio hat die Inseln nach seinem Sieg im chinesisch-japanischen Krieg und wenige Wochen vor der Kolonisierung von Taiwan geschluckt. Deswegen erhebt auch Taipeh Anspruch darauf.

Nach dem Zweiten Weltkrieg kontrollierten die USA die Senkaku zunächst, überließen sie 1972 aber zusammen mit Okinawa Japan, freilich ohne Stellung zu beziehen, wem sie gehörten. Tokio sagt heute, Peking habe damals nicht reklamiert. Aber in China tobte 1972 die Kulturrevolution, es gab keine Regierung, die sich um außenpolitische Marginalien hätte kümmern können.

Bis vor zwei Jahren hat Japan die Ansprüche Chinas und Taiwans zumindest pro forma als Position stillschweigend akzeptiert. Als Tokio und Peking in den 1970er-Jahren die Beziehungen normalisierten, kamen sie überein, die Inseln dürften die Kooperation nicht belasten. Zwar gab es gelegentlich Zwischenfälle mit Fischern, aber alle drei Seiten, also auch Taiwan, hielten sich an die Stillhaltevereinbarung. Der Ostasienexperte Phil Deans von der Temple University in Tokio meinte sogar, am liebsten wäre es den Regierungen, die Inseln würden im Meer versinken.

Thursday, September 20, 2012

japanese history in korean textbook

http://www.tsukurukai.com/05_rekisi_text/rekishi_Korean/Korean.pdf

서장
역사로의 초대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조상이 살아온 역사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가 없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문제를 극복해 왔는가, 즉 옛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 배우고자하는 역사는 일본 역사이다.
이는 바꿔서 말하면 여러분과 핏줄이 이어진 조상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조상은 여러분의 부모이다. 부모 위에는 네사람의 조부모가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여러분의 조상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한다.
이 일본열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재 교실에서 책상을 나란히하고 있는 여러분의
조상은 공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역사는 어느 시대를 보아도 우리들 모두의
공통된 조상이 살아온 역사이다.
*일본문명전통
세계 어느 민족이나 각각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듯이 일본에도 자신의 고유한
역사가 있다. 일본 국토는 옛날부터 문명을 발달시키며 독자적인 전통을 키워 왔다.
고대 일본은 중국에서 출현한 문명으로부터 겸허하게 배우면서도 자신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립된 국가를 만들어 착실하게 역사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현재에 전해진 문화 유산・역사 유산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구미열강제국의 힘이 동아시아를 삼키려고 했던 근대에 있어서는 일본은 자국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구문명과 조화의 길을 찾아내 근대국가 건설과 독립 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여러나라와의 긴장과 마찰이 따르는 힘든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의 이러한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운
오늘날의 일본이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일로 상상한다
역사를 배울 때 중요한 것은 각 시대마다 선조들이 직면했던 문제를 이해하고
우리도 그와 같은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역사상 사실이 그냥 암기 해야 할 별 개의 사건이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사람들의 염원이나 동기, 사실과 사실의 연결로 보일 것이다. 깊히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발견이나 다양한 관점과도 접할수 있게 될 것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미래을 향한 과거의 사람들과의 대화인 것이다.
2
제1장 원시와 고대의 일본
제 1 절 일본의 여명기
제 2 절 고대국가의 형성
6 야마토조정과 고분의 확대
야마토조정에 의한 국내통일
중국의 역사서에서 「왜국(倭國)」이라고 불리었던 일본은 4 세기 무렵, 중국의
문자기록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 기간에 중국은 국내가 분열하여
대외적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바로 그 시기, 한반도는 북부에서는 고구려가 강국이 되었고 남부에서는 백제나 신라가
대두되어 통일국가에 대한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주변각국의 움직임에 맞추듯이
일본열도에서도 작은 나라를 합하여 통일국가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
움직임의 중심은 야마토(奈良県)를 세력의 기반으로 하는 「야마토조정」이라고 불리는
정권 이었다.
야마토조정의 시초에 대해서는 당시의 문자기록은 없다. 그러나, 야마토조정이
강대한 정권이 된 시기가 4 세기 전반 무렵이라는 것은 다음에 서술할 고분의 보급
상황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7 야마토조정과 동아시아
백제를 도와서 고구려와 싸우다
고대 한반도 국가들이나 일본은 중국의 동향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220 년에
한(漢)나라가 멸망한 후 약 400 년간 중국에는 많은 작은 나라로 나뉘거나 남북으로
나뉘어 싸우는 내란시대가 계속되어 주변 여러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4 세기이후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가 점차로 강대해 졌다. 고구려는
4 세기 초에 한반도 내에 있던 중국영토인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4 세기 말에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까지도 공격했다. 백제는 야마토조정에 구원을 청했다.
일본열도 사람들은 원래 귀중한 철의 자원을 찾아서 한반도 남부와 깊은 교류가
있었으므로 야마토조정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출병했다. 그 때 야마토조정은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라고 하는 곳에 거점을 구축했다고 여겨진다.
야마토조정의 군세는 백제를 도와서 고구려와 심하게 싸웠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호태왕)의 비문에는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지만 백제와 야마토조정 군세의 저항에 부딪쳐 한반도 남부의
정복은 이룰 수 없었다.
왜국(倭國)의 다섯 왕에 의한 조공
5 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한(漢)민족의 남조와 유목민인 북조에 나뉘어 싸우는 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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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맞이했다. 남조 역사서에는 왜국(倭國)의 다섯 왕이 열번 가까이 사자를 보냈던
일이나 야마토조정의 지배가 확대되는 상황이 쓰여 있었다. 야마토조정이 일부러
남조의 조공국이 된 것은 고구려에 대항하고 한반도 남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신라의 대두와 임나(가야)의 멸망
한반도는 3 개 나라가 분립되어 있었는데 6 세기가 되면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가
세력을 확장한다. 고구려나 신라에게 압박받은 백제는 신라에 대항했지만 힘든 입장에
처한다. 백제로부터는 구원을 청하는 사자가 잇달아 일본열도로 왔다.
신라는 임나(가야)까지도 위협하게 되었다. 562 년에 결국 임나는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야마토조정은 한반도에서의 거점을 잃는다.
귀화인과 불교 전래
5 세기부터 6 세기에 걸쳐서 야마토조정이 한반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결과,
한반도를 통해 중국의 진보된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일가족이나 집단으로 일본에 이주한 귀화인
(도래인[渡來人])은 토기나 금속기의 가공, 토목건축 등의 기술을 전하고 한자로
쓰이는 조정의 문서 작성에도 힘을 발휘했다. 한자사용의 정착과 함께 유교에 관한
책도 전해졌다.
또한 6 세기에는 백제의 왕이 일본에 지원을 청할 때 불상과 경전을 야마토조정에
헌납하여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었다.
제 3 절 율령국가의 성립
8 쇼토쿠태자의 신정
호족의 싸움과 수(隋)나라의 중국통일
6 세기가 되자 야마토조정을 지탱하던 유력한 호족들이 서로 싸우게 되었다. 특히
불교가 전해지자 불교를 타국에 의거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소가씨(蘇我氏)와
예로부터의 일본 신들에게 노여움을 산다고 하여 반대하는 모노노베씨(物部氏)가
대립했다. 소가씨는 귀화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양자는 결국 무력으로 싸워,
소가씨가 모노노베씨를 무너뜨렸다.
6 세기말, 중국대륙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589 년에 수(隋)나라가 중국전토를
약 300 년만에 통일한 것이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수나라의 출현은 동아시아 각국에
있어서는 커다른 위협이었다. 한반도의 백제, 고구려, 신라는 수나라에 조공했다.
일본도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태도를 강요받게 되었다.
쇼토쿠태자의 등장
4
이러한 기로에 서 있던 일본에 나타난 것이 쇼토쿠태자(우마야도황자 [廐戶皇子(구호
황자)]라는 젊은 지도자이었다. 쇼토쿠태자는 황족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한꺼번에
열사람의 호소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전설이 남아있을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최초의 여제인 스이코천황(推古天皇)이 즉위하자 593 년에 쇼토쿠태자는 천황을
도와주는 섭정을 하게 되었다.
600 년에 쇼토쿠태자는 수나라에 사자(遣隨使)를 보냈다. 일본이 중국 왕조와 교섭을
갖게 된 것은 120 년만의 일이었다. 수나라의 강대함을 안 쇼토쿠태자는 일본이 독립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대륙으로부터 뛰어난 문화나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관위 12 계(冠位十二階)와 1 7 조 헌법
쇼토쿠태자는 수나라와 대등한 외교를 진행하기 이전에 우선 국내 개혁에 착수했다.
소가씨와 혈통을 이은 태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협력하면서 정치를 폈지만
태자정치의 실질적인 의도는 호족의 힘을 누르고 유교나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드리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603 년에 쇼토쿠태자는 유력한 호족이 관직을 차지한 지금까지의 체제를 고치고
출신이나 가문에 상관없이 나라를 위하여 뛰어난 일을 한 인물을 관리에 채용하는
관위 12 계(冠位十二階)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은 관리의 지위를 12 개 단계에 나누고
관의 색깔로 구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어서 604 년에 쇼토쿠태자는 17 조헌법을 제정했다. 그 내용은 호족들이 싸움을
그만두고 사람들이 화(和…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겄)의 정신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서로
협력할 것등을 바라는 것으로써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는 관리의 마음가짐과 국가의
이상이 나타났다. 화(和)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그 후 일본사회의 전통이 되었다.
9 견수사와 「천황」호의 시작
견수사 파견
국내개혁에 성공한 쇼토쿠태자는 607 년에 재차 견수사를 파견했다. 그 대표자로서
선발된 사람이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이다. 그는 지방 호족출신으로 관위 12 계제도에
따라 재능을 인정받아 발탁된 인물이었다.
이 때 수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해 뜨는 나라의 천자,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글을 부친다. 잘 있느냐 」 라고 쓰여 있었다. 쇼토쿠태자는 서면의 글에서
대등한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수나라에 결코 복종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었다.
수나라의 황제 ・양제(煬帝)는 이 편지를 무례하다고 하여 격노했다. 조공국인
왜국(倭國)이 황제 별칭인 “천자”라는 칭호를 자기 스스로 군주의 칭호로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인의 관념으로는 황제는 세상에 단 한명 밖에 존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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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고구려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중하고 귀국하는 오노노 이모코에게 답례의
사자를 딸려 보냈다.
「천황」호의 시작
다음해인 608 년에 세번째 견수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 때 서면의 글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문제였다. 중국 황제의 노여움을 산 이상 중국의 군주와 똑같은 칭호를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시 왜왕의 칭호에 돌아가 중국으로 하여금 자국(自國)의
지배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본이 대륙의 문명에
흡수되어 고유한 문화를 잃게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때의 편지에는
「동쪽의 천황, 정중하게 서쪽의 황제에 말씀드린다」 라고 썼다. 황제라는 문자를
피함으로써 수나라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그에 못지않는 칭호를 씀으로써 양국이
대등하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것이 천황이라는 칭호가 쓰이게 된 시초가 된다. 일본의 자립자세를 나타낸 천황
칭호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중단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쇼토쿠태자와 불교와 고래(고유)의 신들
쇼토쿠태자는 607 년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건립하는 등 소가씨와 함께 불교를
두텁게 신앙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쇼토쿠태자는 일본 고유의 신들을 소중히 모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해, 스이코천황은 전통신들을 계속해서 모실 것을 맹세했다.
이와 같은 쇼토쿠태자의 태도는 외국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국의 문화를
버리지않는 일본의 전통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쇼토쿠태자는 내정과 외교에서 모두 일본 고대국가의 설계도를 그린 지도자였다.
쇼토쿠태자가 활약한 7 세기에는 정치나 문화의 중심지가 아스카지방에 있었으므로 그
시대를 아스카시대(飛鳥時代)라고 한다.
10 대화 개신
7세기의 동아시아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군을 보내는 등의 무리가 원인이 되어 30 년정도로 멸망한다. 그
후 중국을 통일한 것은 당(唐)나라이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황제를
중심으로 법률, 호적, 병역, 과거등 잘 정비된 국가제도를 구축했다.
일본으로부터는 견수사에 잇달아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고 동행한 유학생이나
승려들이 현지에 체재하며 뛰어난 당나라의 제도를 배웠다.
7 세기 중엽이 되면 국력을 기른 당나라는 대립하는 고구려를 공격한다. 한반도
3 국에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일본도 위기에 대비하여 국가체제를 강화해야만 했다.
6
소가씨의 횡포
한편, 쇼토쿠태자 사망후 소가씨 일족의 횡포는 극치에 달한다.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아들 에미시(蝦夷)는 마치 천황같이 행동하며 자기 아들들을 모두
왕자라고 부르게 했다. 에미시의 아들인 이루카도 쇼토쿠태자의 장남인
야마시로노오에 왕(山背大兄王)를 비롯한 쇼토쿠태자 일족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마침내 쇼토쿠태자의 이상을 이어받아 소가씨를 억누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기운이 생겨났다. 그 무렵, 쇼토쿠태자가 파견한 유학생들이
잇따라 귀국해 발전된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전한 것도 개혁 기운을 고양시켰다.
대화개신(大化 改新)
소가씨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계획을 마음에 품은 것은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였다. 645 년에 나카노오에 황자는 궁정에서 소가노
이루카 (入鹿)를 토벌하였고 그 소식를 들은 에미시는 자해했다. 이리하여 소가씨는
멸망했다.
그 해 조정은 일본에서 최초의 연호를 만들어 「대화 원년」이라 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왕조가 정한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정해서 계속적으로 사용한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다음해에는 지금까지 황족이나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직접
통치하는 공지・공민의 방침을 제창했다.
대화원년에 시작된 이 개혁을 대화개신이라 한다. 대화개신은 쇼토쿠태자 이래의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천황과 신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11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
백촌강(白村江) 전투와 국방의 준비
7 세기 중엽,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공격했다. 일본과
300 년의 친교가 있던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의 남부가 당나라의 지배하로 들어가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는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를 중심으로
한 조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많은 병사와 물자를 배로 보냈다. 당 ・신라의
연합군과 663 년에 한반도 남서부의 백촌강(白村江=지금의 금강)에서 결전하여 이틀
동안의 장렬한 싸움 끝에 일본 측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백촌강 전투). 일본 군선
400 척이 타올라 하늘과 바다가 화염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제는
멸망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한편, 백제로부터는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해 평민들까지도 일본으로 망명해 왔다. 그
중의 일부는 오우미(시가현), 일부는 동국에 정주했다. 조정은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정치제도의 운영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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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패배는 일본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당과 신라의 내습을 우려한 일본은
큐슈에 사키모리(바닷가를 지키기 위하여 동일본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배속시키고,
미즈끼(큐슈의 大宰府를 방위하기 위해 쌓은 토루(土壘)와 성)를 만들어 거국적으로
방위에 진력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오우미로 옮기고 즉위하여
텐치천황(天智天皇)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한층 더 국내 개혁에 힘써 전국적인 호적을
만들었다.
임신의 난
천지천황 사망 이후, 672 년에 천황의 아들인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와 천황의
남동생인 오오아마노 황자(大海人皇子)사이에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임신(壬申)의 난이라고 한다. 오오아마노 황자는 지방호족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고 기민하게 대처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싸움 가운데 호족들은 분열되어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되었다. 이리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의 발전을
꾀하는 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의 정치
내란에 승리한 오오아마노 황자는 텐무천황(天武天皇)으로 즉위하여 황실의 지위를
높이고 공지・공민을 목표로 한 개신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천무천황은 중국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본뜬 국가법률 제정과 나라의 역사서 편집에
착수했다. 또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의 지위나 승진제도를 정하여 호족들을 이 제도
안에 편입시켰다.
천무천황 다음에 황후인 지토오천황(持統天皇)이 즉위하고 개혁을 이어받았다.
지토오천황은 수도로 나라분지(奈良盆地) 남부에 후지하라쿄(藤原京)를 건설했다.
이것은 처음으로 중국을 본 떠서 만든 대규모의 수도 건설이다. 이렇게 쇼토쿠 태자의
신정 이래 국가의 건설이 완성에 가까워졌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도록 된 것도
이 무렵이라 한다.
제 4 절 율령국가의 전개
16 무사의 등장과 원정(院政)
무사의 등장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 년∼1185 년)에는 병역의무가 폐지되고 대외적인 위기도
적었으므로 변경지방을 제외하고 국가 정규군은 두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도 있고해서
수도나 지방에서는 모두 점차 치안문란이 눈에 띄게 되었다.
그래서 國司(지방장관)로서 지방에 부임하여 그대로 정주한 일족이나 지방 호족 중에는
자기소유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집단으로 무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것을
武士라 한다. 무사는 중앙귀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지도자로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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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로 하여 주종관계를 맺고 무사단을 형성했다.
그 중에서도 천황 후손으로 생각되는 겐지(源氏)와 헤이씨(平氏)가 통솔하는 무사단이
유력했다.
원정 (院政)
11 세기 중엽을 지나 200 년만에 후지와라씨를 외척으로 하지 않는 고산조오 천황
(後三條天皇)이 즉위하여 국정의 실권을 쥐었다. 이에 의해 천황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후지와라씨의 세력을 억누르게 되었다. 천황은 정치개혁에 나서 후지와라씨
장원을 포함한 많은 장원을 정리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 흐름을 이어받은 시라카와(白河) 천황은 황위를 물려준 후에도 상황 (上皇)으로서
천황의 배후에서 강력한 정치를 펼쳤다. 상황이나 상황이 거주하는 궁궐을
“원(院)”이라고 칭했으므로 그러한 정치를 원정이라고 한다. 섭정, 관백(關白)정치는
천황 외척이 실권을 쥐는 정치였지만 원정은 천황의 친족이 조정의 관례에 얽매이지
않은 대담한 정치를 펼쳤다. 그런 이유로 후지와라씨의 세력은 쇠퇴했다.
무사의 대두
이윽고 무사는 조정이나 “원”의 무관으로서 발탁되어 궁중이나 귀족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지방에서도 지방장관의 지휘하에 들어가 도둑을 단속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사라는 신분이 점차 인정받도록 되었다.
10 세기 중엽, 관동지방의 호족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와 세토우치 (瀨戶 內)
지방의 원래 지방장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무사단을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할 때도 중앙 귀족들은 무사의 힘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1 세기 후반에는 동북지방에서 2 번에 걸친 전란이 생겨 칸토오 (關東) 지방의
무사들을 인솔하여 그것을 진압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그 지방 무사들의
신망을 모으게 되었다.
당나라 멸망과 송나라 건국
중국에서는 907 년에 당나라가 멸망했다. 약 300 년에 걸쳐서 동아시아에 군림해 왔던
왕조의 소멸은 주변 각국에 있어서도 큰 사건이었다. 그 후 약 반세기동안 중국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혼란기가 계속되다가 979 년에 송나라가 중국전토를
통일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분열되어 쇠퇴하고 936 년에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했다.
제 2 장 중세의 일본
제1절 무가 정치의 시작
20 원구(元寇)
몽골제국
13 세기 초, 몽골고원에 징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립했다. 몽골제국은 무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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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군단을 각지에 침공시켜 순식간에 서아시아에서 중국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서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구축했다. 그와 같은 움직임에 유럽 사람들조차도 겁내어
몽골인을 두려워했다. 몽골제국 제 5 대 황제인 쿠빌라이 ・한은 대도(大都…지금의
북경)라는 수도를 만들고 국명도 중국을 따라 원(元)이라 했다.
원구
쿠빌라이는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여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마저도
정복하려고 기도했다. 쿠빌라이는 우선 일본에 자주 사자를 보내어 복속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조정과 가마쿠라막부는 일치되어 계속하여 그것을 거절했다. 막부는
집권자인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내습에 대비했다.
원의 군은 1274(文永11)년과 7 년후인 1281(弘安4)년 2 번에 걸쳐 대규모 해군을
준비하여 일본을 공격했다. 일본측은 약탈과 폭행 피해를 입었으며 신병기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가마쿠라막부의 무사들은 그것을 국난으로서 받아들여 용감하게
싸웠다. 또한, 두 번 모두 원나라의 군은 그 후 「神風」이라고 불리게 된 폭풍우가
덮쳐 패배했다. 그렇게 일본은 독립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 두 번에 걸친 원군의
내습을 「원구」라고 한다.
역사의 명장면 몽고 내습
원군의 두 번에 걸친 내습은 각각의 연호를 따서 분에이(文永)의 役과 고오안 (弘安)의
役이라고 불린다.
분에이(文永)의 역에서는 약 3 만명의 병사들이 900 척의 배를 타고 습격해 왔다. 원군은
쓰시마(대마도), 이키를 점령하고 큐슈북부의 하카타항에 상륙하여 그에 맞서 싸우는
막부군을 괴롭혔다. 그 전법이란 북이나 징을 치고 독을 바른 화살과 화기를 사용하여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 저항도 강하고 갑자기 폭풍우가 덮친 것도 있어서
원나라군은 큰 피해를 내고 퇴각하게 되었다.
고오안 (弘安)의 역에서는 14 만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4400 척의 배를 타고 큐슈북부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하카타만 연안에 석루를 쌓는등의 방비가 있었고 충분한 준비를
한 일본의 막부 무사들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 원나라군의 상륙을 막아냈다.
일본측은 한밤중의 어두운 틈타 적의 배에 침입하여 충분히 벤 후에 배에 불을 붙이고
되돌아왔다. 거기에 또 폭풍우가 겹쳐 원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갔다.
무사들의 용감한 전투나 폭풍우, 게다가 원군이 해전에 익숙치 않았다는 것이나,
몽골인 이외의 병사가 많이 섞여 있어서 통솔력이 결여된 것도 일본 승리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제 2 절 무사정치의 움직임
23 무로마치 막부
감합(勘合)무역과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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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한(漢)민족들의 반란에 의해서 원나라가 북방으로 쫒겨나고
명(明)나라가 건국되었다. 명나라는 일본에 왜구 단속을 요구해 왔다. 왜구란 이 무렵에
한반도나 중국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집단을 말한다. 그들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 義滿)는 즉시 이에 응하여 왜구를 금지시키고 명나라와의
무역(일명무역)을 시작했다. 이 무역은 왜구와 구별하기 위하여 合札로 된 증명서
(勘合)를 사용했기 때문에 감합무역이라 불린다. 일본은 도검・동・유황・칠공예 제품등을
수출하고, 동전 ・견직물 ・서화등을 명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중요한
재원으로 삼았다. 막부의 힘이 쇠퇴하자 지방 영주인 오오우치(大內)씨가 무역 실권을
장악했다.
16 세기 중엽, 감합무역이 정지되자 다시 왜구가 번성했는데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왜구가 한반도로부터 중국연안을 어지렵힌 것을 원인으로 명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26 오우닌(應仁)의 란과 전국시대의 지방영주
조선과 류큐왕국
한반도에서는 14 세기에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려 조선국(이씨 조선왕조)을 건국
했다. 조선도 명나라와 같이 일본에 왜구의 금지와 통교를 요구해 왔다. 막부가 이에
응한 결과, 일조(日朝)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6 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과 조선
간에 마찰이 생겨 조선과의 무역은 시들어지게 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15 세기 전반에 쇼오(尙)씨가 3 세력을 통일하여 류큐(琉球)왕국을
세웠다. 류큐왕국은 슈리(首里)를 수도로 하여 일본이나 명나라와 국교를 맺었다. 또한,
먼 동남아시아까지도 배를 보내 중계무역으로 활약하고 번영했다.
제 3 장 근세의 일본
제 1 절 전국시대에서 천하통일에 향하여
30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치
조선으로의 출병
약 100 년만에 일본통일을 이루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기세를 떨쳤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명(明)나라를 정복하고 천황과 함께 중국대륙으로 이주 하여
동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1592
(분로쿠원[文祿元])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 여만명의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의 장수를 인솔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 세력은 순식간에 수도의 한성(지금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조선 북부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의 이순신이 인솔하는 수군의 활약, 민중의 저항,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원군등으로 불리한 전투가 되어 명나라와의 평화 교섭을 위하여 병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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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하였다(임진왜란).
그러나 명나라와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고 1597(케이쵸[慶長]2)년에 토요토미 히데
요시는 재차 약 14 만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선 남부에서 앞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다음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병사를 철수했다(정유재란).
2 번에 걸친 출병으로 조선의 국토나 사람들의 생활은 두드러지게 황폐해 졌다. 이
출병에 막대한 비용과 병력을 낭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일족의 지배는 흔들렸다.
아리타야키
그 당시 포로로서 일본에 끌려 온 조선의 도공에 의해 도자기 기술이 전파되고 다도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제 2 절 토쿠가와 막부의 정치
34 쇄국하의 대외관계
조선조・류큐・에조치
토쿠가와 막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에 쓰시마(대마도)의 소오(宗)씨를
통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했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맺고 조선으로부터는 장군의 대가 바뀔 때마다 조선통신사라고 불리는
사절이 에도(江戶)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을 받았다. 또한 부산에서는 소오씨의
왜관이 설치되어 약 500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여 무역이나 정보 수집에 종사했다.
17 세기 초, 사쓰마번(지금의 카고시마현)은 병사를 보내 류큐왕조인 쇼오(尙)씨를
복종시켰다. 류큐왕조는 토쿠가와 막부에 대해서도 신하(臣下)로서의 예의를 갖췄다.
그러는 한편, 류큐왕조는 새롭게 중국에 성립된 청(淸)나라에도 조공했는데 토쿠가와
막부는 류큐왕조가 중개하는 청과의 무역에 대한 이익을 위하여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에조치(호까이도) 남부를 지배한 마쓰마에번은 어업에 종사하는 아이누족과 교역하여
해산물이나 털가죽등을 입수했다. 아이누족은 치시마(千島)열도나 카라후토(사하린),
나아가서 중국의 동북부등과도 교역했으므로 일본에서는 그들을 통해서
에조노시끼라고 불리는 중국산 직물도 유입했다. 아이누족은 마쓰마에번의 불공정한
무역방침에 반발하여 샥샤인을 지도자로 한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샥샤인의 란)
제 4 장 근대 일본의 건설
제1절 구미 진출과 토쿠가와 막부 말기의 위기
47 사쓰마, 조오슈 동맹과 토쿠가와 막부멸망
막부는 왜 쓰러졌을까?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가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한지 15 년 뒤
토쿠가와 막부는 멸망했다. 구미열강이 몰려온 후 이씨조선은 44 년 후에 멸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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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는 멸망할 때까지 72 년간이나 살아남았다. 이들에 비하면 일본의 토쿠가와 막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쓰러진 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가?
여러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조나 청조에는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있어서 전국의 우수한 인재가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문에 황제나 국왕이 강력한 힘을 갖는 반면, 지방의 대항세력은
약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과거제도가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각지의 지방영주 밑에서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지방에서도 큰 힘을 쌓을 수가 있었다.
또한, 일본에는 황실제도가 있어 전국의 무사들은 궁극적으로는 천황을 섬기는
입장이었다. 황실에는 정치 실권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열강의 압력이 높아지면 막부의 권위는 쇠퇴하지만 막부를 대신하여 황실이 일본
통합의 중심이 되므로 정권 이동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 2 절 메이지 유신
51 근린제국(近隣諸國)과의 국경 확정
대만출병과 류큐
일본은 청나라과의 국교수립을 위하여 1871(메이지 4)년 일청수호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국제법 원리에 의거하여 양국의 대등관계를 정한 조약이었다.
같은 해 류큐도민 66 명이 대만에 표착하여 54 명이 대만 주민에게 살해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류큐는 일본과 청나라의 양쪽에 복속되어 있었다. 일본은 류큐도민
살해의 책임을 청나라에 물었지만 청나라는 대만 주민을 「국가통치가 이르지 않는
자」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대만 주민을 처벌하는 것은 일본의 의무라 하여 1874 년에
대만에 파병했다(대만출병). 이 충돌은 근대 국민국가 관념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던 청나라와 일본의 사고방식 차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청과의 협의 결과,
문제는 해결했지만 청나라는 이 일을 계기로 류큐도민을 일본국민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일본은 1879(메이지 12)년 류큐를 일본영토로 하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했다(류큐처분).
그리하여 일본은 근린제국(近隣諸國) 사이에 있는 국경을 거의 확정는데 성공 했다.
조선과의 외교
메이지정부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8 년에 새롭게 조선과 국교를 맺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준비한 국서에 부적절한 문자가 써 있다는 이유로
외교관계 맺을 것을 거부했다. 일본정부는 조선과의 외교에서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었다.
② 일본사절이 지참한 국서에 일본천황을 가리키는 “황”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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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되는 문자로 되어 있었으므로 조선왕조는 수용할
수가 없었다.
52 이와쿠라 사절단과 정한론
이와쿠라 사절단
1871(메이지 4)년, 廢藩置縣(藩을 폐하고 縣을 둠)한 후 신정부로서 정식으로 조약
체결국을 방문하여 동시에 조약개정의 예비교섭을 위한 특명 전권 대사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대표로 하는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키도 타카요시
(木戶孝允)등의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에 파견되었다(이와쿠라 사절단). 사절단은
유학생을 포함해 총 110 명으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2 년 가까이 구미문명을 실제로 배운 결과 구미와 일본의 문명진보 차이는
약 40 년정도로 추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산업 확립(“國]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여 구미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한론(征韓論)
그러나 일본국내에서는 1873(메이지 6)년, 일본의 개국 권고를 거절해 온 조선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하여 士族(메이지 유신이후에 옛 무사계급에게 주어졌던 신분)들 간에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요하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다. 폐번으로
실업한 사족들은 징병령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무사의 긍지가 손상되었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았는데 그들 가운데는 조선과 싸워서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나타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기대를 건 사람은 사절단의 부재중 정부를 지키고 있었던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는 정부에서는 근대국가를 이루는 개혁을
진행시키면서도 사족들의 정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들의 사회적인 역할과 명예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이고는 스스로 사절로서 조선조에 갈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이타가키
타이스케 (板垣退助), 에토오 신페이 (江藤新平)등 다른 참의들도 그에 동의하여 정부
결정을 얻어냈다. 사이고 자신은 전쟁을 각오한 교섭으로 조선에 문호를 개방하고자
했다.
정부의 분열과 세이난(西南)전쟁
그러나 구미각국의 강대한 군사력을 눈으로 보고 귀국한 오오쿠보 토시미치, 이와쿠라
토모미 등은 우선 국력의 내실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출병으로 인한 구미열강의
간섭 초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정이나 정부내부를 공작하여 閣議에서 정식 결정된 사이고의
사절파견을 연기했다. 이에 분노한 사이고와 에토오 신페이, 이타가키 타이스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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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관직을 사임하였다. ①
1876(메이지 9)년, 정부는 구(舊)번대신 사족들에게 지급하던 봉록을 일시금 지급으로
대신하고 중지했다(질록처분). 그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각지의 사족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병사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사이고는 카고시마(鹿兒島)에 돌아와서
사학교를 열고 있었는데 불만을 가진 전국의 사족들은 사이고에게 기대를 모았다. 1877
(메이지 10)년에 카고시마의 사족들은 사이고를 지도자로 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징병된 평민들로 구성된 정부군에게 폐배했다(세이난 전쟁). 그 이후 사족들의
무력저항은 완전히 사라졌다.
① 그후 일본은 1875 년에 조선의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파견하여 무단으로 주변의
연안을 측량하는 등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군함이 포격되어 교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화도사건). 이것을 이유로 일본은 다음해인 1876 년에 일조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것은 조선으로써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제 3 절 입헌국가의 출발
인물 칼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난한 소년시대●
메이지국가 건설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년)는
토쿠가와 막부 말기의 조오슈번(長州藩)에서 무사보다 신분이 낮은 보병의 아들로
자랐다.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가는 경사에서 하기(萩)지방의 명물인 「뱅어」를 먹고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할 만큼 가난했다.
청년이 된 이토는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의 쇼카손 주쿠(松下村塾)에서 학문을 배웠다.
사람이 출세하는 것은「뛰어난 사람과의 만남」이라고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많은 선배들과 접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토쿠가와 막부를 토벌하는 운동을 하는 가운데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에게 발탁되어
메이지 신 정부에서는 28 세로 효오고현(兵庫縣) 지사가 되었다. 그후 오오쿠보
토시미치 (大久保利通)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로 참의(현재의장관)가 되었다.
●절찬받은「일장기」연설●
이와쿠라 사절단이 구미에 2 년 가까이 파견됐을 때, 이토는 대사인 이와쿠라 토모미(岩
倉具視)에 버금가는 부사가 되었다. 그 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이토는 사절단을 대표
하여 연설했다.
그 중에서 이토는 수백년 이어진 일본의 오래된 제도는「탄환 하나도 발사되지 않고,
피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고 철폐되었다」(廢藩置縣(“번(藩)”을 폐지하고 현(縣)을ㄹ
둠)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 국기에 있는 빨간 동그라미는「지금 바로 바다 위에 떠오는
태양을 상징하며 우리 일본이 구미문명의 한가운데를 향해 약진하는 표시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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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지었다. 그것이 유명한 「일장기 연설」이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토는 그 이후에도 일본을 구미열강과 대등한 힘을 가진 근대국가로 만들기 위한
사업에 다른 누구보다도 전력을 다해 메이지 정부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헌법 제정을 향한 노력●
이토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헌법제정과 국회개설이었다. 그는 1882(메이지 15)년부터
1 년이상이나 유럽에 유학하여 독일의 헌법학자등에게서 강의를 받고 귀국하였다.
1885 년에는 45 세로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 후 수년동안 이토는 많은 사람과 의논하면서 헌법초안을 만들어냈다. 그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많은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산결정과 법률은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원칙을 관철했다. 그리하여 이토가 심혈을 기울인 대일본제국 헌법은
1889(메이지 22)년에 발포되었다. 독일헌법 등을 따르면서도 일본전통에 의거한 그
내용은 민간의 급진적인 자유민권론자나 제 외국의 언론기관에서도 상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이토는 다른 원로들과 달리 생애에 걸쳐 재산 축적도 없었고 누구와도 차별없이
교제했다. 생전 그가 하던 말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술을 마시고 놀고 있을 때도 내 머리 속에서 항상 국가라는 두글자가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자손이나 집안 일을 생각한 적이 없다. 언제나 어디서나 국가에 관한 일만
생각한다 」. 이토의 활약을 지탱한 것은 바로 이「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한반도와 일본
●일본독립과 한반도●
동아시아 지도를 봅시다.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약간 떨어져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이다. 그 일본을 향해 대륙으로부터 한쪽 팔과 같이 한반도가 튀어나와 있다.
양국의 이 지리적인 관계는 오랜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한반도로부터는 중국등의 발전된 문명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한반도에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미친 적도 있다.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의
동향에 주의를 해야만 했다. 일본이 고대 율령국가를 형성한 것도 동아시아 내에서
자립할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카마쿠라시대에 원구(元寇)의 거점이 된 것도 한반도였다. 반대로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가 한반도에 대군을 보낸 적도 있다. 에도(江戶)시대에는 쓰시마번(對馬藩)을
통해서 토쿠가와 막부와 조선의 우호관계가 이어졌다.
●한반도 근대화와 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정권수립 후 즉시 조선과 국교를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청조에 복속해 있던 조선은 외교관계 맺기를 거절했다. 조선을 개국시킨 1876
(메이지 9)년의 일조수교조약은 그 제 1 조에「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명시했다.
이는 청조의 영향으로부터 조선을 분리할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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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보다 더 무서운 대국은 부동항을 찾아서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1 년에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그 위협은 물밀듯이
밀려왔다. 한반도가 동방에 영토를 확대해 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알맞은 기지가 되고 섬나라인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어렵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 일본은 조선 개국후 근대화를 시작한 조선에 대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에서도 시찰단이 와서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배우고자 했다. 조선이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보장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조선을 둘러싼 일청의 대립●
한편 청은 동아시아 정세를 다른 각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1879 년에 오랫동안
청나라에도 조공해 온 류큐가 오키나와현(沖繩縣)이 되고 일본영토로 편입된 것은 청
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후 청불전쟁에서 패하여 또 다른 조공국인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조공국이 잇달아 소멸하는 것은 황제의 덕이
쇠퇴한 것을 의미하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질서가 봉괴되는 위기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래서 청은 마지막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일본을 적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일본이 일청(日淸) ・일러(日露)의 두 전쟁을 치루게 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있었다.
57 일청전쟁
조선조를 둘러싼 일본과 청나라의 항쟁
일본은 조선 개국후 그 근대화를 도와주기 위하여 군대제도 개혁을 원조했다. 그러나
1882(메이지 15)년에 개혁에 뒤지고 냉대받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일부 서반들의 폭동이
일어났다(임오군란). 청은 그 기회를 타 수천명이나 되는 군대를 파견하여 즉시 폭동을
진압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 년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따라 근대화를 향상시키려 했던 김옥균들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그때도 청의 군대는 이를 탄압했다(갑신정변). 한반도에서
청조와의 세력다툼에 두번 패배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여 마침내는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일청전쟁과 일본의 승인(勝因)
1894(메이지 27)년에 한반도 남부에서는 갑오 농민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을 추방하고자 하여 한 때는 한반도 일부를
제압 할 정도였다. 소수의 병력밖에 없던 조선왕조는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청했는데 일본도 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일청 양국의 군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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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하여 일청(日淸)전쟁이 시작했다.
전장은 조선 외에 만주(중국 동북부) 남부등으로 확대되고 일본은 육전과 해전
모두에서 청을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일본이 승리한 원인으로는 신병기 장비에 군대 의
훈련 ・규율 등이 복합된 것을 들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전 일본인의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모노세기조약과 삼국 간섭
1895(메이지 28)년, 일청 양국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하고 청은 조선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재정수입의 약 3 배에 해당하는 배상금 약 3 억엔(2 억량)을
지불하고 랴오둥반도(遼東半島)나 대만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잠자는 사자」로 불리어 그 저력을 두려워하던 청나라는 세계의 예상과는 반대로
신흥국 일본에게 맥없이 패하여 고대로부터 이어진 동아시아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중국은 순식간에 열강각국의 분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구미열강과 쉽게 대등해 질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에 야심을 가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권유해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을 재촉했다. 그것을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청나라를 무너뜨렸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3 국에 저항할 힘을 가지지 못한 일본은 할 수 없이 일정액의
환부금과 랴오둥반도를 바꾸고 놓아주어야만 했다. 일본은 중국의 고사에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슬로건으로 하여 관민 일체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국력의 충실에 진력했다.
58 일러(日露)전쟁
일영동맹
삼국 간섭후, 일본은 러시아와 영국, 어느 쪽과 동맹을 맺을것인가의 선택에 쫓기어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대립되었다. 논쟁의 촛점은 러시아에 대한 견해이었다. 러시아는
1900 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을 구실로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2 만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주류시켰다. 러시아가 만주에 머문채 한반도로 나오지 않도록
러시아와 교섭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논쟁에 결말을 지었던 것은 외교관인 코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제출한 의견서
였다. 그는 일로와 일영, 어느쪽 동맹이 일본의 국익이 될지를 논했으며 일영동맹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무라 의견서는 정부방침으로 채택되었으며 그에 의거하여
교섭한 결과, 1902(메이지 35)년에 일영(日英)동맹이 체결 되었다. 일영동맹은 그후
20 년동안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일러 개전(開戰)과 전투 행방
일본의 10 배나 되는 국가예산과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는 만주에 병력을 증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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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그대로 묵시하면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될 것은 분명했다. 정부는 시기가 늦게 될 것을 우려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1904(메이지 37)년 2 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에 공격을 개시하고 일러전쟁을 시작했다.
전장이 된 곳은 한반도와 만주였다. 1905(메이지 38)년에 일본육군은 고전 끝에
여순(旅順)을 점령하고 봉천(奉天)회전에서 승리한다.
러시아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발트해에 발틱함대를 파견했다. 함대중 38 척이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여 인도양을 횡단하여 약 7 개월에 걸쳐서 일본해(동해)에 왔다.
그것을 맞아 싸운 일본 연합함대는 토오고오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사령장관의 지휘하
에서 병사의 높은 사기와 능숙한 전술로 발틱함대를 전멸시키고 세계의 해전역사에
남는 경이적인 승리를 거뒀다.(일본해 해전)
세계를 변화시킨 일본의 승리
일본해 해전에서 승리했을 때 일본은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차관과 국채로 처리해 왔던
국가예산의 8 년분에 상당하는 군사비를 다 사용했다. 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 국력의
차이가 생겨 형세가 역전될 것은 명백하였다.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골라서 일러간 강화를 중개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
결과, 1905(메이지 38)년 9 월에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1897 년, 조선은 국명을 대한제국이라고 개칭했다)의
일본에 의한 지배권을 러시아에 인정하도록 하고, 중국 랴오둥반도 남부(후에 일본은
칸토오슈(關東州)라 칭함)의 조차권(租借權)을 취득하여 남만주에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의 권익을 양도 받아 사하린 남부(남 카라후토)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한편
배상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려 해도 국력이 한계에 달한 것을
모르는 국민의 일부는 이를 불만으로 여겨 폭동을 일으켰다(히비야 화공 사건)
일러전쟁은 일본의 생존을 건 전쟁이었다. 일본은 그 전쟁에 승리하고 자국(自國)의
안전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 탄생한지 얼마 안되는 유색 인종국인 일본이 당시
세계최대의 육군대국인 백인제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로 있던 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황색인종이 앞으로 백색인종을 위협할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이 구미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59 세계열강 대열에 낀 일본
일본국가의 새로운 과제
일청・일러의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구미열강의 압력 하에서 독립을 유지
하려는 토쿠가와 막부말기 이래의 목표를 달성했다.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는 향상되어
세계열강의 대열에 들어갔다. 근대 일본의 건설은 여기에서 완성되었다.
하지만 국제적 지위 향상은 일본국가로서는 무거운 시련이 부가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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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유일한 유색인종 대국으로 구미열강으로부터 경계을 받게 되었다.
한국합병
일러전쟁 후, 일본은 조선에 조선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했다. 구미열강은 영국의
인도, 미국의 필리핀, 러시아의 외몽고(지금 의 몽골국)등 자국(自國)의 식민지나
세력권의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에 한국을 영향하에 넣는 것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조선합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0(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 국내의 반대를 누르고 합병을
단행했다(한국합병).
한국국내에는 민족의 독립을 잃는 것에 대한 심한 저항이 일어났고 그후에도
끈질지게 독립회복 운동이 진행되었다.
한국 합병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철도・관개시설 등을 정비
하고 토지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토지 조사 사업으로 지금가지 해 오던
경작지로부터 쫓겨나는 농민도 적지않았고 또한 일본어 교육등 동화정책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제 5 장 세계대전 시대와 일본
제 1 절 제 1 자 세계대전의 시대
64 베르사이유 조약과 대전후의 세계
아시아의 독립운동
대전 후, 민족자결의 기운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도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는 비폭력주의의 지도자인 간디나 네루가 약속된 인도의 자치를 영국에
요구했다. 영국은 그것을 탄압했지만 민족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
일본 지배하에 있던 조선에서는 1919 년 3 월 1 일에 구(舊)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데모 행진을 했다. 그
움직임은 순식간에 조선전체에 퍼졌다(삼일독립운동). 그 때 조선총독부는 무력으로
그것을 탄압했지만 그 후에는 무력으로 억압하는 통치방법을 변경했다.
중국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중국의 구(舊)독일 권익을 계승하게 되자
1919 년 5 월 4 일에 북경의 학생대모를 계기로 항의운동이 일어났다(오사운동). 이
운동은 그후 중국 각지에 확산되어 갔다.
제2절 제 2 자 세계대전의 시대
73 제 2 자 세계대전
나치스 독일과 유럽 전쟁
제 1 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1933 년에 나치스당의 히틀러가 정권에 오르고 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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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박해하는 한편 무력에 의해 영토를 회복하고 확장시켰다.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데다가 1939 년 9 월에 폴란드에 전격적 으로 침공하여 이를 소련과
분할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제 2 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 년에 독일군은 서유럽에 침공하여 파리에 입성,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 군사동맹의 실패
일본은 유럽에서의 독일승리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1940(쇼오와 15)년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포함한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먼 두 유럽국과의 군사동맹은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게다가 영국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심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1941(쇼오와 16)년 4 월에 일본은 소련과도 일 ・소 중립조약을 맺고 두 조약으로
압력하여 미국을 양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해 6 월에 독일이 소련에 침공하여 그
의도는 깨졌다.
경제봉쇄로 압박받는 일본
일본은 석유 수입선을 찾아서 인도네시아를 영유하는 네덜란드와 교섭하던 것이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4 개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상황이 발생해 불리하게 몰리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는 ABCD 포위망이라
불렸다.
1941 년 4 월, 악화된 일미(日美)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일미교섭이 워싱턴에서
시작되었지만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7 월에 일본의 육해군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에
들어갔다. 그것을 남부불인진주(南部佛印進駐)라 한다. 사이공은 일본의 남진 거점이
되는 군사상의 중요지점이었으므로 위기감에 쌓인 미국은 즉시 재미 일본자산의
동결과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 전면금지로 보복했다. 8 월에는 미 ・영 양국은 대서양
상에서 회담을 열고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여 영토 불확대, 국경선 불변경, 민족자결등
양국의 전쟁목적을 강조했다. 일미교섭은 계속되었지만 진전은 없었다. 11 월에 미국은
일본이 중국 ・인도지나로부터 무조건적인 전면 철퇴를 요구하는 강경한 제안 (헐
노트)을 강요하였다. 그것을 최후통고라고 받아드린 일본정부는 최종적으로 대미개전을
결심한다.
74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1941(쇼오와 16)년 12 월 8 일, 일본해군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 기지를 공습하고 미국
의 태평양 함대에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가했다. 이 작전은 미국의 주력함대를
격파하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일, 일본 육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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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반도에 상륙하여 영국군을 격파하면서 싱가포르를 향하여 진군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하고 이 전쟁은 「자존자위」를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정부는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명명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하고 제 2 차 세계대전은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과 미국・영국・
네덜란드・소련・중국의 연합국이 전세계에서 싸우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개전을 뉴스로 알게 된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그 후 잇달아
전해지는 戰果에 도취해 있었다. 다른 한편 미국정부는 일본의 교섭중지 통고가 진주만
공격보다 늦어진 것은 비열하게 속여서 공격한 것이라고 자국민들에게 선전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지금까지 전쟁에 반대했던 미국
국민에게 “Remember Pearl Harbor” 를 슬로건으로 하는 대일전쟁을 향해 단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암전(暗轉)하는 전국
일본의 첫 승리는 놀랄 만큼 훌륭했다. 말레이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과 70 일만에
반도 남단의 싱가포르에 있는 영국군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연합국 측의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것도 있고해서 순식간에 일본은 광대한 동남아 전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1942(쇼오와 17)년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는 미국해군에
패하여 항공모함 4 척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미군은 반전했다. 일본은 제해권을
잃고 보급로도 끊어졌으며 수송선은 미국 잠수함에 의해서 잇달아 침몰되었다. 일본과
미국의 생산력 차이도 점차 표면화되어 일본군은 부족한 무기 ・탄약으로 고전했지만
일본 장병들은 투철한 전투 정신을 발휘해서 잘 싸웠다.
75 대동아회의와 아시아각국
아시아에 확산되는 독립에 대한 희망
일본의 서전 승리는 동남아 또는 인도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꿈과 용기를 키웠다.
동남아에 있어서 일본군의 저돌적인 진격은 현지 사람들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군 포로가 된 영국군 인도인병사중에서 인도 국민군이 결성되어
일본군과 협력하여 인도를 향해 진격했다. 인도네시아나 버마에서도 일본군의 지도로
군대가 결성되었다.
대동아회의
일본은 이들 아시아 각지역에 전쟁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며 동시에 그 결속을
나타내기 위해 1943(쇼오와 18)년 11 월에 토쿄(東京)에서 대동아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연합국의 대서양 헌장에 대항하여 대동아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각국의
자주 독립, 상호제휴에 의한 경제발전, 인종차별 철폐를 강조했다. 그 회의 이후 일본은
구미 세력을 배제한 아시아인에 의한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을 전쟁의 명목으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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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내세우게 되었다.
아사아각국과 일본
이 전쟁은 전장이 된 아시아 여러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괴로움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병사나 민중에게는 일본군 침공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은 점령한 동남아 각지에서 군정을 강요했다. 현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구미
각국에서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군정에 협조했다.
그러나, 일본 점령지역에서는 일본어 교육이나 신사 참배등의 강요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연합군과 결탁한 한일 게릴라 활동도 일어나 일본군은 이에 대해 엄중하게
대처하고 일반시민들을 포함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또한 전쟁말기에 일본이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식량부족이나 현지 사람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후에 일본이 패전하여 철퇴한 뒤에 이들 식민지는 거의 십여년 동안 잇달아
자력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일본군 병사중에는 현지에 남아 독립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남방진출은 원래 자원 획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아시아
각국에서 시작한 독립의 움직임을 촉발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패전 후에 일본은 그 나라에게 배상했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의 사상도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76 전시하의 생활
국민의 동원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일선 군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이나 교육,
문화등 모두를 걸고 하는 총력전 시대가 되었다. 일본도 일중(日中)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 경제, 산업, 교통등 모두를 정부가 통제하고 운용하는 총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전쟁에 따른 물자 부족으로 국민의 생활에서도 순면・순모제품이나 가죽, 고무제품등이
사라졌다. 정부는 국민정신의 총동원운동으로 소비절약이나 저축증강등을 호소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전쟁상황이 악화되자 국내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징용을 했고, 중학교 3 학년이상의 학생은 근로동원,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또한 대학생은 징병유예가 취소되고
출정하도록 했다(학도 출진).
한반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후 일본식 이름을 쓰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시되었고,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전쟁말기에는 징병이나
징용이 한반도나 대만에도 적용되어 현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희생이나 괴로움을
강요하게 되었다. 또한 수 많은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강제로
연행되어 심한 조건하에서 일할 것을 강요했다.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이 부족해서 사찰의 종 등, 금속이라는 금속은 전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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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출되어 생활물자는 극도로 궁핍해 졌다. 그러나 이 같이 어려운 가운데 많은
국민들은 열심히 일 하고 잘 싸웠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77 종전외교와 일본의 패전
얄타에서 포츠담까지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모두 전쟁의 대세가 밝혀져가고 있었다. 1945 년 2 월에 소련
크림반도 얄타에는 미국・영국・소련 3 개국 수뇌가 모여서 연합국측의 전후 처리에 관해
의논했다(얄타회담).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련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3 개월 후에 대일 참전한다고
회답했고 그 대신에 일본령 사할린 남부와 치시마(千島) 열도를 요구해 미국과 소련은
이에 합의했다.
4 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부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승격했다. 연합군이 독일에 침공하자 히틀러는 자살했고 베를린은 폐허가 되어 5 월에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7 월에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영소 3 개국 수뇌가 모였는데 26 일에 일본에
대한 전쟁의 종결 조건을 가리킨 포츠담선언을 미영중 3 개국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원폭 투하와 소련 침공
일본정부 안에서는 오키나와를 점령당한 6 월쯤부터 전쟁의 종결을 둘러싼 최고지도자
회의가 몇번씩이나 열렸다. 일본정부는 대일참전을 비밀리에 결정했던 소련에게 그런
사실도 모르고 미국과의 종전에 대한 중개를 요청했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자 스즈키 칸타로(.木貫太郞)수상이나 주요 각료는 조건부
항복요구라는 점에 착목하여 그것을 수락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육군이
반대하여 본토결전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정부는 잠시 소련의 중개에 대한
회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8 월 6 일에 미국은 세계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다. 그런 상태에 놓여진 이상 일본정부도 종전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8 일에 소련은 일소 중립조약을 어기고 일본에 선전 포고하였으며 그
다음 날인 9 일에 만주로 침공해 왔다. 또 같은 날,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천황 결단을 내리다
9 일 심야, 쇼오와 천황이 참석하여 어전회의가 열렸다. 포츠담선언의 즉각적인 수락에
관한 의견은 찬부 동수가 되었다. 10 일 오전 2 시, 스즈키 수상이 천황 앞으로 나가서
결단을 재촉했다. 천황은 포츠담선언 즉시수락에 따른 일본의 항복을 결단했다.
8 월 15 일 정오에 라디오의 옥음(玉音)방송으로 국민은 기나긴 전쟁의 종결과 일본
패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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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이후 일본국민이 처음으로 체험한 패전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 2 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대전 전체의 전사자는 2200 만명이었고, 부상자는
3400 만명으로 추정된다.
제3절 일본의 부흥과 국제사회
79 점령정책의 전환과 독립회복
국제연합과 냉전개시
1945(쇼오와 20)년 10 월에 연합국은 두번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조직으로 국제연합(UN)을 결성했다. 그러나 전쟁의 싹은 없어지지
않았다. 동유럽을 점령한 소련은 각국의 공산당 활동을 통해 서유럽까지 공산주의의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영향력을 막기 위하여 서유럽에 대규모 경제원조를
하고 1949 년에는 소비에트연방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으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편, 소련도 1949 년에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NATO 에 대항하여 1955 년에
동유럽각국과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결성하였다.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이 세력을 다투는
냉전시대로 돌입했다.
중국은 일본에 패전후 그때까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재개했다. 1949 년에는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피했다. 한반도에서는 1948 에 남쪽에는 미국이 지지하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소련의 영향하에 있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이 만들어져 대립했다.
그리하여 냉전은 동아시아로 확산되었다.
점령정책의 전환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억제했던 정책을 전환시켜, 일본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된 경제력을 가진 자유주의 진영의 강력한 일원으로
성장시킬 방침으로 변경시켰다.
1950 년 6 월에 북한은 남북 무력통일을 목표로 소련의 지지하에 갑자기 한국을
침공했다. 한국군과 맥아더장군이 지휘한 미군을 주체로 한 UN 군이 그에 반격했지만
전황은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며 전쟁은 1953 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6.25 전쟁). 일본에 주류하는 미군이 한반도에 출동한 후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은 GHQ(연합국군총사령부)의 지령으로 경찰예비대(지금의 자위대)를
설치했다. 또한, 일본은 미군에 많은 물자를 공급하였고 일본경제는 회복했다(조선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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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절 경제대국・일본의 역사적인 사명
81 세계의 기적・고도경제성장
외교 관계의 진전
1965(쇼오와 40)년에 일본은 한국과 일한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여
유상 2 억달러, 무상 3 억달러의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의 통치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조국 복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내각은 비핵 삼원칙을 표명하고 핵병기없이 기지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동의를 미국으로부터 얻어내, 1972(쇼오와 47)년 5 월에
오키나와 본토 복귀가 실현되었다.
1970 년대가 되면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에 대한 견제도
있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양국관계는 정상화를 향했다. 이어 1972 년 9 월에
타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수상은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일중(日中) 공동성명에 조인하여
일본과 중국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에 의해 대만의 중화민국과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후 1978 년에는 일중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
追加
이때, 일본군에 의해서 중국 군민에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남경사건). 더우기, 이
사건의 희생자 수등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으로 의문점이 생겨서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Yoshiwara,the red light by the long march

http://ameblo.jp/252400/entry-10501118933.html

映画の主人公のファッションデザイナーを演じた女優さんが
戦時中、故郷・新潟に疎開してた事もあって興味深く・・・。

映画は戦後、大成功した女性ファッションデザイナー(岡田茉莉子)を軸に展開。
若い時、占領米軍の黒人兵との間に身籠った混血の私生児(ジョー山中)が、
青年になって手かがりを頼りにニューヨークから訪ねてくる・・・
しかし、体を売っていた過去を知られたくない彼女は実の「息子」を・・・。

人間の証明 ジョー山中 ~Proof of the Man~


後に知ったのですがジョー山中さんは、
若い時に母親を失い、養護施設を転々とされていました。
そんな思いも込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
大正の詩人、西條八十の詩を楽曲に使った
情感溢れるこの歌は当時大ヒット。

「母さん、僕のあの帽子どうしたでせうね
ええ、夏、碓氷峠から霧積へ行くみちで
渓谷へ落としたあの麦藁帽子ですよ...」。

映画は台湾や中国でも公開され人気を呼びました。
「草帽歌」として中国系カラオケにもあり今も親しまれています。



ニューヨークの知人が桜の季節にこの程、京都を旅した由。
そのフォトブックから舞子はんの写真を拝借↓。

外国の人は、芸者、舞子、芸妓、コールガール、売春婦・・・の
区別がよくつかないみたいですね。
昔、アメリカで「ゲイシャガールは、売春婦か?」とよく聞かれました。

「芸者」は文字通り芸が売り物、体は売らぬ、とされていますが、
祇園の舞子はーんのような格式高い所はいざ知らず、
混乱の時代、その線引きは必ずしも明確では無い所もあったようです。
東京も数々の芸者町があったことが知られていますが、
例えば隅田川を挟んで浅草と向島では格が違って、
「浅草芸者は芸を売り向島芸者は枕を売る」とも評されています。

また江戸時代には、吉原などの遊廓の遊女とは
それぞれ違った役目をこなしていたようです。
まぁ所詮、男女の仲ですから
推して知るべしでしょうか。

時にはお忍びの大名の桜の花見の座にも呼ばれたと言う逸話も。

幕末を駆け抜けた坂本龍馬のこんな言葉↓を
明治から続く老舗の桜鍋屋(馬肉料理屋)の主人が引用していました。

「咲いた桜になぜ駒繋ぐ 駒が勇めば花が散る」

桜の季節にほんのり桜色に色づく桜肉(馬肉)、
ゲン担ぎには良さそうです。

実はこの桜鍋屋の主人と云うのは、大学のサークルの後輩、
店は、吉原遊廓の正面玄関(大門)がかつてあったたもとにあります。

後輩の話では、その昔この大門近くには数十軒の馬肉屋が軒を連ねていたそうで。
今はこの後輩が営む一軒だけになりました。

吉原に入る前に馬肉を喰って馬力をつける、そんな習いがあった当時の話です。

明治の頃の吉原は、まだまだ江戸時代の「伝統」をそのままに。

遊女もまた公認の「職業」だった時代です。

江戸時代何度も大火にあった吉原ですが大正12年の関東大震災でも壊滅。

その度に不死鳥の如く蘇ってきましたが、
今から53年前の昭和32年の4月1日、
吉原の「伝統」は、売春防止法の施行で終焉を迎えました。
吉原の一部はその後業態を変え、ソープランドに。

吉原の大門に続く道のひとつに「大門通り」と云うのがあります。
バスも運行する通りですが、その道を辿ると私の家まで来ます。

そして歩いて3分ほども行くと、家最寄りの商店街を抜けて
赤穂浪士も行進した「永代通り」に出ます。

この交差点の界隈、今は「東陽」と言う名ですが江戸の昔から
昭和40年の初め迄、「洲崎」と呼ばれていました。

交差点に面した信用金庫の支店は、今も町の旧名を使っています↑。
そして「洲崎」の名前は、54年前に公開された映画でも偲ぶ事が出来ます。

40歳半ばで惜しまれながら「夭折」した川島雄三監督が愛した作品。
信用金庫のある交差点は、映画でも出て来ます↓。

ボンネットバス手前に「洲崎」の地名、クスリの三木薬局は大門通り沿いと広告↓。

車上の2人を演じるのは当時の人気俳優の三橋達也さんと新球三千代さん。

喰い潰れた2人は働き場所を探して「洲崎」で降ります。

交差点の先、大門通りをちょっと行くと洲崎パラダイスと書かれた大きなアーチ。

このアーチこそ洲崎の「大門」、西の吉原、東の洲崎と唄われた有名な「洲崎遊廓」入り口。

売春防止法施行直前の映画撮影当時はまだ「色町」の「繁栄」ぶりが見られます。

アーチは橋を渡って「遊廓」への入り口。下には洲崎川と言う川が流れていました。

アーチ手前のたもとの橋脇には貸しボート屋もあって、これも映画に登場します。

こちらは今の映像↓、かつての川は埋め立てられ今は自転車道と緑道の公園に。

ここは橋が架けられていた場所(旧アーチ下)から「パラダイス」内側を望んだ所。

橋(洲崎橋)の記憶は、今はこの碑↓で見るだけ・・・。

3百軒以上の遊廓がひしめきあった昔、東京大空襲で焼けた後も賑わってました。

吉原と洲崎遊廓の2つの大門(正面玄関)を繋いだのが大門通り。

遊廓をはしごするつわものを評し、大門通りは親不孝通りとも呼ばれていました。

映画の主人公2人が転がり込んだのは↑橋手前角の呑み屋。↓今は不動産屋さん。

呑み屋は映画の設定で、実際は貸しボート屋の家屋を使って撮影。

・・・とは当時から続く肉屋さんで聞いた話。映画の呑み屋は「千草」と言う店名。

宝塚出身で粋な着物姿の新玉三千代さんが演じたのは以前パラダイスにいた女。

別の町で男と食い潰し、男を連れ再び舞い戻った町で「千草」に住み込みで働き・・・。

自分の住む町の私が生まれる前の昭和三十年代初頭の風情が見られて興味深く・・・。

呑み屋「千草」のあった今の場所を再び↓。不動産屋さん。その奥の通りが・・・。

映画ではこんな感じ↓。かなりの活況が見られます。

そしてこれが同じ場所の今↓。

今はグルメ雑誌にも登場し無い僅かばかりのの小さな呑み屋さんがあるだけ。

昔は夕方となればパラダイスに繰り出す前に景気づけた木場の旦那衆で賑った一角。

映画と同じ「酒の店」の赤ちょうちんをぶら下げたお店は最近閉店。

映画ではこの近くのそば屋が出て来て三橋さん演じる男は出前持ちのバイト。

それを指導するそば屋の「小僧」は小沢昭一さん、チョイ役でした。

日活の看板娘、芦川いづみさんも店員役で。デビュー間もない初々しさそのままで。

芦川さん演じた娘さんは三橋さんにほのかな恋心を・・・顛末ははレンタルで。

橋から前出の永代通りの交差点は十数秒、角に明治からの蕎麦屋を見て再び家の方へ。

大門通り沿いをちょっと歩くと前方に見えて来るのが・・・。

今も現役の電動サトちゃん。

店内にもサトちゃんはいます。

このお店、明治から続く薬局。映画の冒頭に出たバス停の広告の三木薬局です。

遊廓、パラダイスがあった頃は、「その方面」の薬もかなり多く扱ってたとか。

↓親不孝通りこと大門通りを前に薬局を望みます。生活ルートで何度も通る場所・・・。

が、この日、大きな新発見。薬局脇の路地向こうにあるマンションのベランダ・・・。

サトちゃん・・・↓。サトちゃんです、サトちゃん発見。

まさにチン百景~~~~。

iphone撮影の為、拡大した映像がちょと粗いのですが、
間違い無くサトちゃん。
薬局で確認したところ、ご主人も存在は知っていましたが、
薬局とは関係無いとの事、マンションの住人も知らないご家族だそうです。

他の口コミでも聞いた事無く、
どうしよう、ほんとうにアノ「珍百景」番組に申請しようかしらん。